즐거운 여행이야기

정동진과 강릉 오죽헌을 돌아보다

꽃마을 2008. 11. 27. 16:29

강원도  강릉에 있는 정동진에서 개최된 세미나에 참석하고 시간을 내어 오죽헌과 선교장을 들러보았다.

                    <정동진>

산과 바다 그리고 호수를 고루 갖춘 천혜의 비경이 곳곳에 숨어있는 강원도 무명의 간이역에서 일약 관광명소로 떠오른 강릉시

 강동면 정동진역... 우리 나라에서 바다와 가장 가까운 간이역이며, 조선시대 한양의 광화문으로부터 정확히 동쪽으로 내달으면

 닿게 되는 바닷가라해서 "정동진"이라 이름지어진 곳,

95년 방영돼 인기를 끌었던 SBS 드라마 "모래시계"의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기차를 타고 내리는 사람보다 역을 구경하러 오는 사람이 훨씬 많은곳,  그러나 이 작고 한적한 어촌의 사계절 바다 여행으로는, 또 추억을 하나쯤 만들고 싶은 사람에게는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곳이다. 플랫폼과 붙어있는 백사장으로 내려가 산책하며  동해의 푸른 바다와 해돋이를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추억과 낭만의 여행지 정동진이다.

                          <숙소인 선크루즈 호텔>

 

<정동진의 일출>

 

 

 

 

 

       <오죽헌 >

오죽헌(烏竹軒)은 우리나라 어머니의 사표(師表)가 되는 신사임당(申師任堂)이 태어나고 또한 위대한 경세가(經世家)요 철인(哲人)이며 정치가(政治家)로서 구국애족(救國愛族)의 대선각자(大先覺者)인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1504∼1551)는 성품이 어질고 착하며 효성이 지극하고 지조(志操)가 높았다. 어려서부터 경문(經文)을 익히고 문장(文章), 침공(針工), 자수(刺繡)뿐만 아니라 시문(詩文), 그림에도 뛰어나 우리나라 제일의 여류(女流) 예술가(藝術家)라 할 수 있으며 자녀교육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현모양처(賢母良妻)의 귀감이 되고 있다.

율곡 이이(1536∼1584) 선생은 어려서 어머니에게 학문을 배워 13세에 진사초시(進士初試)에 합격하고 명종(明宗) 19년(1564) 생원시(生員試),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모두 장원급제(壯元及第)한 후 황해도(黃海道) 관찰사(觀察使), 대사헌(大司憲) 등과 이조(吏曹)·형조(刑曹)·병조(兵曹)의 판서(判書)를 역임하였다. 조선(朝鮮) 유학계(儒學界) 에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과 쌍벽을 이루는 대학자(大學者)로서 기호학파(畿湖學派)를 형성했고 붕당(朋黨)의 조정(調停), 10만(十萬) 군대(軍隊)의 양병(養兵)을 주장하였으며 대동법(大同法), 사창(社倉)의 실시에 노력하였다. 글씨, 그림에도 뛰어났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고 선조(宣祖)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으며 파주(坡州)의 자운서원(紫雲書院), 강릉(江陵)의 송담서원(松潭書院) 등 20여개 서원에 제향(祭享)되고 있다.

오죽헌은 강릉 유현(儒賢)인 최치운(崔致雲)(1390∼1440)의 창건(創建)으로 아들 응현(應賢)은 사위 이사온(李思溫)에게 물려주고 이사온은 다시 그의 사위 신명화(申命和)(사임당의 부친)에게,신명화는 그의 사위 권화(權和)에게 물려 주면서 그 후손(後孫)들이 관리하여 오던 중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淨化事業)으로 문성사(文成祠), 기념관 등이 건립되어 현재와 같은 면모를 갖추고 선생의 위업과 교훈을 길이 추앙(追仰)하게 된 것이다. 

 

 

 

 

       

선교장 

선교장은 조선 시대 상류 사대부집의 전형을 읽을 수 있는 대표적인 주택으로 알려져 있다. 옛날 경포호수는 장장 30리에 달하는 커다란 호수였었는데 이 호수를 배로 건너다녔다고 해서 선교장이 있는 곳을 배다리라 부르고 집이름도 배다리의 한자어인 선교장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선교장은 남자 어른들이 거주하던 사랑채인 열화당, 작은 사랑채, 하인들이나 손님들이 머물렀던 행랑채, 여자 어른들이 쓰던 안채, 집 앞 연못에 있는 정자인 활래정, 아주 귀한 손님들이 왔을 때 모셨던 별당 건물 두 채 등 모두 10 채가 넘어 살림집으로서 모자람이 없는 구조를 하고 있다. 행랑채에는 대문이 두 개가 나 있다. 왼편에 솟을대문이고, 오른편에는 평대문이다.  솟을대문은 사랑채로 가는 남자들이, 평대문은 안채로 가는 여자들이 드나드는 대문이다. 솟을대문에는 ‘선교유거(仙嶠幽居)’라고 적은 현판이 걸려있는데, '신선이 거처하는 그윽한 집'이라는 뜻이다. 신선처럼 여유 있게 살고 싶어 한 집주인의 소망을 담은 당호이다. 솟을대문을 지나 왼편으로 들어서면 널찍한 사랑채 마당과 함께 ‘열화당’(悅話堂)이라고 이름 붙인 사랑채가 눈에 들어온다.

이 건물은 1815년(순조 15)에 오은거사(鰲隱居士) 이후(李后)가 건립한 것이며  뒷 산의 노송과 열화당 옆에 있는 계화나무와 뒤뜰에 서 있는 수백년에 된 늙은 백일홍나무는 열화당과 연륜을 함께 해왔고 살림집의 아취를 더욱 풍성하게 해준다.

활래정은 대문 밖인 선교장 입구에 있는 큰 연못 옆에 세워진 정자로서, 연못 속에 돌기둥을 세워 주위에 난간을 돌렸다.  활래정은 창덕궁의 부용정(芙蓉亭)과 흡사한 모습으로 축조되었다고 한다. 활래정은 이름 그대로 선교장에서 북쪽에 있는 한밭(大田)의 태장봉(胎藏峰)으로부터 끝임 없이 내려오는 맑은 물로 이 연못의 활수(活水)가 되고 여름철이면 연꽃의 아름다움은 선교장 전체의 분위기를 살린다.

 선교장 터를 이루는 산줄기는대관령에서 뻗어내린 줄기이다. 대관령에서 뻗은 산줄기의 한 가닥은 오죽헌 자리를 만들고 다시 동북쪽으로 뻗어 시루봉으로 솟고

 시루봉에서 뭉친 맥은 경포대 방향으로 뻗어가면서 여러 개의 자그마한 산줄기들을 나누게 된다. 시루봉에서 뻗어내린 부드럽고 완만한 능선이 선교장 뒤편으로 흘러 청룡과 백호를 이루었다. 선교장의 좌향은 정남향에서 서쪽으로 30도 정도를 튼

남서향인 간좌(艮坐)이다. 좌향을 정남향으로(子坐)으로 놓아 시원한 전망을 확보하지 않은 것은 백호 끝 자락을 안대로 삼기 위해서라고 한다.

또한 선교장 행랑채 23칸을 일자로 배치한 까닭이 수구가 열려있는 것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선교장의 낮은 언덕에는 수십그루의 노송으로 가득차 있다. 선교장 담장 너머로 늘어선 소나무숲에서 선교장을 바라보면 청룡과 백호가 집터를 안온하게 감싸고 있는 모습을 잘 볼 수 있으며 반대편 백호안산에서는 선교장 전경을 잘 내려다 볼 수 있는 관산점이 된다.